色, 樂, 狂...

06:30
어젯밤은 잠을 설쳤다.
잠자리도 문제였거니와 피곤함에 맥주 두 캔을 마시고 9시 넘어서 눈을 감았는데
놀러온 이들은 밤 12시부터가 노는 시간이다.
그들은 12시에 텐트를 치고 불을 피우고 고기와 술을 먹고 마신다.
시끄러움에, 그리고 텐트 옆을 지나치는 발자욱 소리에 문득문득 잠을 깨곤 했다.
그렇게 뒤척이다 눈을 뜨고 일어나니 6시가 넘었다.
해는 동쪽 산마루 위에 벌써 올라왔다.
잠결에 해변으로 나가 해뜨는 해변을 찍었다.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태양을 향해 한컷 찰칵.
태양이 날 잡아먹을 듯 하다.
푸른 하늘과 밝은 태양을 보니 오늘도 날씨로 고생할 길이 훤해보인다.
어제 제대로 보지 못했던 협재 해수욕장 주변을 산책했다.
아침부터 파란 바다가 눈에 들어왔으나....

8시에 출발하기로 계획을 잡았기 때문에 야영지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 후 씻고 짐을 챙기다 보니 야영지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일어난다.
어젯밤, 많은 자전거들이 보이는데 그 주인들은 아직 꿈나라인것 같다.
내 뒤쪽의 한 텐트에 젊은이가 텐트에서 굴러나와 맨땅위에 몸을 비빈다.
짐을 챙기고 떠날때 쯔음 그 젊은이가 일어나더니 자기 모습을 보고 황당해한다.
물과 음료수를 사고 출발하기 직전,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아가씨들에게 사진한방 부탁하고 2일차 여행을 출발한다.
젠장...
아가씨들이 사진을 위에서 아래쪽으로 찍었다.
안그래도 짧은 다리가 더욱 짧아보인다.... ㅜㅜ
8시 20분이다.

09:10
신게물 용천수에 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다.
마실 수 있는 물이 아니라서 아무도 없을지도...

오는 길에 풍력발전하는 곳을 봤다.
큰 풍차 몇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선진국에서는 풍력/수력 등 화석이나 원자력 에너지가 아닌 대체에너지를 찾는다는 뉴스를 들었다.
한편으로는 외도에 폐기물을 처리하려는 뉴스도 떠오른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 차이가 생각이 난다.

조금 더 가다보니 수백미터가량 선인장을 재배하는 곳이 나타났다.
나무도 없이 해변 들판의 선인장들은 아주 색다른 모습이다.
영화나 TV에서 보던 사막의 선인장들과는 다르다.
조그맣고 옹기종기 모여있고 널따란 밭을 이루고 있다.

선인장의 가시는 다른 나무의 이파리다.
선인장의 가시가 나는 손바닥만한 이파리는 줄기다.
이곳의 선인장은 '백년초'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바닥선인장이라 부르는 식물의 과실을 말한다.
그러나 손바닥선인장이던 그 과실이던 모두를 일컬어 백년초라 한다.
감기와 더위에 좋다고 하는 백년초는 외상에도 좋고, 류마티스에도 좋고 술담그어 먹어도 좋단다.

진한 초록색의 손바닥들 사이사이에 피어있는 붉은 자줏빛 과실은 과연 선인장이 저런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져다준다.
도시의 선인장이라 하면, 주먹만한 작은 화분에 탁구공, 혹은 야구공만한 동그란 선인장이 컴퓨터 옆에 놓여있는 것을 많이 본다.
전자파를 막아주니 어쩌니 하면서 그렇게 현대식 도구에 잘 어울리는 선인장.
그것과는 틀리지만 150여년 전 제주 해안으로 떠내려와 자생하기 시작한 백년초는 한국의 선인장이다.
우리 나라의 산과 들에 나는 모든 식물은 대부분 민간치료법에 많이 사용된다.
전혀 보지 못했던 선인장이란 식물도 옛날 조상들의 지혜로 민중들이 쉬이 사용할 수 있는 약재가 되었다.
지금은 음식으로도, 한방약재로도, 정력제(?)로도 쓰인단다.
수백미터의 선인장밭을 지나 선선한 오전에 용천수에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제주도의 용천수는 몇번 본 바 항상 남탕과 여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여탕에는 들어갈 용기가 없어서 남탕으로 들어갔다.


이곳 신게물 용천수는 그리 깊지도 않고 물도 콸콸 샘솟지 않는다.
그래도 항상 고여있고 아주 차갑다.
오늘 하루 가는 길에 이런 곳이 자주 나왔으면 좋겠다.....
수영복을 꺼내 자전거 뒤에 마를 수 있도록 묶고 출발했다.
아까 지나면서 잠깐 봤던 그런 파아란 해변이 나오면 바로 뛰어들어갈 수 있도록...

09:50
이국적인 등대를 보았다.

'등대'라고 해봤자~ 이겠지만
주변 바위와 갈대, 잡초, 해안 풍경과 어울려 하얀 모습이 아주 멋졌다.
게다가 대부분 등대는 부두 위에 있지 않은가.
이 등대는 부두에 있는 등대가 아니라 더 보기 좋은 것 같다.
바다내음과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등대 주위를 휘감는다.
이대로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하늘로 날리고 싶다.
조용한 가운데 파도소리와 바람에 노래를 부르는 갈대소리가 발을 붙잡는다.


10:20
오늘의 첫번째 목적지인 수월봉에 도착했다.
수월봉에 올라가는 길은 그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경사지다.
끝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라오려 했으나 1/3 지점 남겨두고 내려오는 차를 피하다가 자전거와 함께 옆 풀숲으로 쓰러졌다.
더이상 타고 올라갈 힘이 없어 끌고 올라간다.
수월봉에 올라오니 바람은 아주 시원하고 아까부터 도로에서 부분부분 보이던 차귀도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아까 그 등대에서 멀리 보이던 섬이 차귀도이다.
처음에는 그 섬을 보고 참 희한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양쪽으로 절벽이고 가운데는 움푹 파인 평지다.

그리고 차귀도 옆에는 바위 하나가 바다위에 홀로 우뚝 서있다.
나중에 알고보니 차귀도는 제주도에서 가장 큰 무인도라 한다.
그리고 차귀도, 돌아가는 길을 차단한다는 전설을 가진 섬이라 한다.

해안도로가 끝나면서 어느 오름 같은 곳을 돌아가니 다시 해안도로 표지판이 나오고
차귀도로 들어가는 낚시배들이 즐비한 포구가 나온다.
포구에는 저곳에서 이어도, 공포의 외인구단 영화를 찍었던 곳이라는 푯말이 붙어있다.
처음에는 차귀도의 북쪽에서 보고, 포구는 차귀도의 동쪽이다.
수월봉은 차귀도의 동남쪽, 정확히는 남쪽에 더욱 가깝다.
자전거세상 사장님이 말씀하길 수월봉에서는 날씨 좋은날 많은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한라산 쪽은 약간 뿌연 날씨 때문에 뿌옇게 보이고
대신 바다쪽은 깨끗하게 보인다.
위에서 바라보는 차귀도의 모습은 또한 색다르다.

병든 어머니를 위해 약초를 캐러 왔다가 동생 수월이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자
오빠인 노꼬가 17일 동안 슬피 울었는데 그 눈물은 절벽 곳곳에 솟아나 샘물이 된다는 전설...
수월봉 아래 해안절벽과 용천수를 구경하지 못하고 온 것이 못내 아쉽다.

그렇게 바다와 섬과 주변 풍경을 바라보면서 미군 전투식량을 꺼내 파이를 먹고 조금 쉬었다.
시원한 바람으로 땀을 식히고 덥혀진 몸을 식혔다.
11시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햇살이 따가워진다.
다음 목적지인 송악산까지는 두시간이 넘게 걸리지 싶다.
11시쯤에 수월봉에서 출발했다.
12:30
갑자기 체력이 급속히 소모되었다.
수월봉에 올라가기 위해 너무 힘을 썼는지, 아니면 오전의 더위를 너무 많이 받았는지 점점 더 힘들어진다.
피부는 벌겋게 익고 따가움이랑 피곤함이 번갈아 언습해온다.
1시간 반동안 해안도로를 따라 오긴 왔는데 어딜 어떻게 지나왔는지 기억조차 없다.
간간히 조그만 어촌이 나오고 어촌 주변에 얕은 초록색 해변이 보였다.
동네 아이들이 낚시를 하고 물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 나도 같이 뛰어들고 싶었으나
나의 발은 계속 페달을 밟았다.
다소 큰 마을에 도착하여 무작정 지나가다가 해수욕장 간판이 보였다.
그쪽으로 핸들을 꺾어 도착한 곳이 '하모해수욕장'이다.
억지로 억지로 도착한 해수욕장에서 잠시 바다에 몸을 담궜다.
겉에서 보기에는 초록빛이 감도는 물이었으나 실제로 들어가보니 깨끗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친 몸을 달래기에는 충분했다.
가슴까지 물이 차는 곳까지 들어갔더니, 배 윗쪽은 물이 따뜻한데 배 아래쪽은 차갑다.
그 묘한 느낌에 잠시 기대다가 바다에서 나와 샤워를 했다.
해변에다 텐트를 치는 것을 돈을 받길래 약간 떨어진 곳에다 텐트를 치고 밥을 먹을 준비를 했다.
미군 전투식량을 꺼내어 파스타를 뜯었다.
미군 입맛에 맞을지언정 도저히 내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
두어숟갈 푸고선 봉지째 버렸다.
1시와 2시 사이의 뜨거운 태양을 피해 텐트 안에서 누웠다.
맨발로 가기도 힘든 달궈진 모래밭을 통해 부는 뜨거운 바람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간간히 섞여 텐트 안으로 들어온다.
잠시 누워있으니 모든 바람이 다 시원하다.
텐트를 달구는 강한 햇살마저 따뜻하게 여겨진다.
그렇게 누워 바다를 보면서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어느새 2시 반이 넘었다.
모래 위에 텐트를 치고 누웠으니 모래찜질 효과도 있었을까?
하여튼, 일어나 날씨를 보니 여기저기 구름이 끼고 있다.
이정도면 이제 출발해도 되지 싶다.
15:40
송악산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얼마 머지 않았다.
그러나 송악산 가기 전에 왼쪽으로 이상한 산이 하나 보인다.
점점 흐려지는 날씨에 낮게 드리운 구름을 꼭대기에 걸친 거대한 바위같다.
갑자기 삼국지가 생각나고 서유기가 생각난다. 왜일까...
몇십분동안 그 산이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송악산 들어가는 입구는 마라도행 배를 타는 항구에 있다.
항구에서는 송악산 들어가는 길은 보이나 송악산은 잘 보이지 않는다.
강원도 산골짜기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처럼 보일 뿐이다.
길을 타기 시작하면 왼쪽으로 해안절벽을 따라 시멘트 포장길을 올라가게 되는데
완전히 오르기 전에 오른쪽을 보면 무슨 관광단지같은 것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제주도야 항상 관광단지가 아니던가...
넓직한 아스팔트 도로가 저 멀리 나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쓰린건 나뿐일까나...
좁은 도로를 차들이 왔다갔다 하는데 그 사이를 자전거를 끌다 타다 하면서 올라갔다.
내리막길이 나오고 바람을 맞으며 조금 내려간 후 주차장이 나왔다.
주차장 입구에 자전거를 묶어놓고 사람들이 걸어가는 곳으로 같이 걸어갔다.
그리고 눈에 드러나는 것은 왼쪽의 넓은 바다와 눈앞에 보이는 가파도였다.
힘들었던 생각이 싹 없어질 정도로 송악산의 풍경은 아주 멋졌다.
바다와, 섬과, 절벽과, 수풀이 어우러진 환상이라고 할까...
기암절벽 위에서 보니 많이 흐린 날씨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마라도도 보였다.


징을 갖다 저길 깎고 얼마나 어루만졌을꼬
애증스런 손놀림이 이보다 전율스럴까
심심타 던진 돌 사이좋은 형제롤세




또한 두개의 바위가 바다위에 솟아있는 형제섬과
아까 오면서 보인 이상한 산도 보였다.
그 산이 산방산이라고 한다.
날씨가 좋았으면 훨씬 더 멋진 광경이었을 것이다.
절벽을 기준으로 안쪽으로는 길다란 잔디들이 바람에 따라 물결치고 있었다.
암회색 절벽과 푸른 잔디들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황홀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 절벽 아래에는 일제시대 일본군이 뚫어놓은 15개의 동굴이 있다고 한다.

송악산은 99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한다. 직접 세어보진 못했으나 맞겠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이중분화구라는 것이다.
제주에서도 유일하다는 이중분화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기 위해 해안을 등지고 보았다.
길다란 산 능선이 하나 보인다.

저 안에 또 분화구가 있다는 말이다.
하나의 분화구가 커다랗게 생기고 난 후 그 안에 또다시 분화구가 생겼다는 말이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내려왔던 언덕길로 올라갔다.
중간쯤에 분화구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말농장 간판이 자그맣게 있다. 그 길 건너편에는 말 한마리가 풀위에 조용하게 서있다.
자동차를 타고 왔다갔다 하다보면 이쪽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농장 입구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순간 잠시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무슨 분지처럼 비잉 둘러싸인 분화구가 나타났고 그 내리막길로 긴 잔디들이 바람에 요동치고 있었다.
오른쪽에서 능선을 따라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또다른 바위산같은게 보인다.
저것이 분화구 안의 분화구라는 것인가...
무슨 안간힘을 써서 태어난 곳에 또다시 태어났단 말인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분화구도 수풀에 뒤덮혀있다.

더 깊이 들어가보려 했으나 말농장때문에 그대로 사진을 찍고 뒤돌아섰다.
이것이 송악산이다....
용암이 흘러내리다 굳은 흔적을 마지막으로 보고 힘들게 올라온 언덕을 내려갔다.
이곳에 관광단지 및 유원지를 만든다는 커다란 간판을 보고 씁쓸해졌다.

송악산에서 보인 산방산과 그 앞의 용머리해안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16:30
송악산에서 산방산까지 가는 해안도로를 따라가다보니 운동장에서 군인인지 전경인지 축구를 하고 있다.
그제서야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토요일 오후는 군인들의 전투축구시간 아니던가...
잠시 구경하다가 다시 페달을 밟았다.
산방산이 점점 더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제는 용머리해안도 보인다.
용머리 해안 뒷쪽으로 멀리 절벽도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몸이 엄청 지치기 시작한다.
하늘은 구름에 가려 그나마 햇빛을 받지 않지만 더운 날씨에 흐르는 땀은 계속 눈과 입으로 스며든다.








산방산 입구로 올라가는 도로에서 샛길로 벗어나 용머리 해안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커다란 배 한척을 꾸미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이곳이 하멜이 표류하다 들어온 해안이다.
관광지를 새로 꾸미는 듯 여기저기 공사중이다.
용머리언덕을 좌측으로 끼고 산방산을 등지고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배가 제대로 제 위치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곳에서 꼬불꼬불 언덕길을 따라 산방산 입구까지 자전거를 타다 끌다 올라갔다.
옆에서는 관광객들이 말을 타고 있다.
산방산 옆 도로 꼭대기까지 올라가니 힘이 다 빠진다.
저 멀리 항구같은게 보이는데... 저곳이 화순해수욕장일 것이다.

도로를 내려가기 전에 산방산을 쳐다보았다.
구름이 걸려있는 그 모습은 흡사 중국의 고대 전설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러한 산방굴사를 들어가진 못하고 내리막길을 그대로 내려가기로 했다.




자전거 바퀴가 도로를 제대로 달리지 못한다.
아니, 내 다리가 페달을 제대로 밟지 못한다.
벌써 체력이 다한 것인가..
낮에는 잠시 쉬기도 해놓구선 이렇게 지치는게 싫다.
악으로 깡으로다...
어떻게든지 화순해수욕장으로 가서 빨리 텐트를 치고 쉬고싶다.
얼마 남지 않았다.
17:00
화순해수욕장 푯말을 보고 핸들을 틀었다.
골목골목 내리막길을 1~2분동안 내려왔더니 드디어 해수욕장이다.
지나가다 보니 할머니 두분이서 '학생~ 민박?' 하신다.
그러나 민박이 목적이 아니라 야영지가 목적이다.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된 상태에서 빨리 몸을 뉘이고 싶은데...
허걱... 야영지가 보이지 않는다.
10분동안 헤매다가 누구에게 물어보려고 했으나 다들 내 몰골을 보고 피하는거 같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자전거를 타고 욱씬거리는 엉덩이를 다시 안장에 비비며 해수욕장을 빠져나갔다.
해수욕장을 빠져나와 10여분 갔을 때,
힘이 없어서 무언가라도 먹으려고 음식점을 찾아봤지만 근처에 가게가 없다.
냉면집이 보이길래 찾아갔으나 폐업이다.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온 탓에 다시 올라갈 길이 까마득하다.
산방산 근처에는 아직 구름이 끼었으나 해변쪽에서 다시 비치는 햇살에 몸이 불타오른다.
이대로 가다가는 낙오할 것 같다.
물도 다 떨어졌다.
먹을 것도 없다.
다시 나타난 오르막길을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다 쉬고 올라가다 쉬고...
어디에선가 눕고 싶으나 저 태양은 나를 쉬게 두지 않는다.
어느새 바람도 그치고
간간히 지나가는 트럭이 일으키는 바람만이 먼지와 바람을 가져다 준다.
언덕까지 왔다...
이제는 자전거길도 없다.
차들을 조심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말을 건다...
조금씩... 조금씩... 밟자... 밟자....
17:40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 기분이다.
약간의 내리막과 약간의 오르막이 번갈아있고...
이 근처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저쪽에 '우리가든'이란 가게 간판이 보인다.
길을 건너 가게로 들어갔다.
일단 타는 갈증과 허기를 채우려 냉면을 주문했다.
조끼에 넣은 지도를 꺼냈다.
땀에 절어 너덜너덜 찢어져있다.
이곳은 안덕계곡 근처이다.
계곡에 발담그고도 싶지만, 무엇보다 기운을 내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
원래 목적지는 화순해수욕장이었다. 야영지가 중문에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문에도 야영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화순에서는 야영지를 찾지 못하여 중문으로 변경한 것이다.
모든 옷이 다 땀에 절었다.
가볍게 선풍기를 틀고 바람을 맞으며 냉면을 먹었다.
버섯반찬이 나왔는데 다 먹으니 더 가져다 준다.
이 음식점에는 주인아저씨와 중학생 되어보이는 딸이 둘이서 있다.
주인아저씨가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남들이 먹고 간 상을 딸이 치운다.
우리 집이 중국집 하던때가 생각난다.
배를 채우니 이제서야 기운이 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 괜한 말이 아님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그러고보니,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자전거를 탈 때에는 물과 음료수밖에 마시지 않았다.
오늘도 점심 미군전투식량 먹으려다 포기했으니 아침 식사 후 오전에 먹은 파이가 다다.
주인아저씨가 중문가느냐고 물으시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한시간만 더 가면 된단다.
순간 '한시간 씩이나 더?' 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어딘가.
식후 좋은 기분으로 담배한대 태우고 물 한통 사서 베낭에 끼우고 출발한다.
출발시간은 18시다.

18:50
중간에 자전거여행 팀을 만났다.
길 건너편에서 같은 방향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냐고 물으니 그 팀도 중문까지 간단다. 세명이다.
중문에서 보자고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삼거리가 나오고 거기서부터 서귀포라는 이정표가 나왔다.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무작정 페달을 밟는다.
그 삼거리부터는 거의 내리막길이다.
그리고 양쪽의 도로 가로수는 어느새 야자수로 변해있었다.
내일 이 내리막길을 다시 올라오려니 눈앞이 아른해지며 한숨부터 나온다.
결국 18:40분경 중문 관광단지에 도착했다.
입구서부터 쭈욱 내리막길이다.
다리를 조금 쉬게 하면서 팔과 손에 힘을 주고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중문해수욕장가는 표지판이 보이지 않아서 일단 내려가면 만나겠지 하고 내려갔건만
도착한 곳은 하얏트 호텔이다.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바다다.
호텔 뒤로 길이 보이는 것 같길래 올라오는 학생들에게 물어봤다. 중문해수욕장이 어디냐고.
바로 아래란다. 계단으로 내려가면 해수욕장이란다.
야영장은 이쪽으로 내려가 800미터 정도 모래사장을 지나면 있단다.
어제 이호해수욕장에서 모래사장 위로 자전거를 끌고 갔던 기억이 있기에 절대 무리라고 생각했다.
일단, 직접 내려가서 상황을 봤다.
계단을 주욱 내려가 모래사장과 만나면 저 한참 끝에 제대로 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휴우... 너무 멀길래 결국 다시 거꾸로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또 힘이 빠져버리다니...
질질 끌고 올라가다 테디베어 박물관의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그리고 다시 시원한 내리막길...

19:10
드디어 중문 해수욕장 야영지 도착.
야영지를 확인한 후, 베낭을 풀고 텐트칠 자리를 확인했다.
그리고 막 텐트를 치려고 하는데 바로 옆에 두 젊은 친구가 자전거를 세우고 야영장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자전거여행자들과 제대로 만나는구나.
집이 청주인 ROTC 4학년과 서울이 집인 두 친구는 11시부터 내가 출발한 협재해수욕장을 출발하여
쉬지도 않고 달려 여기에 도착했단다.
아무래도 이들과 오늘밤 몇시까지 같이 있을지 모르겠다.

20:00
텐트를 다 치고 짐을 정리하고 그 친구들과 해수욕장 샤워실에서 땀에 찌든 몸을 씼었다.
그 친구들과는 달리 나는 선크림도 모자도 없이 왔기 때문에 벌겋게 달궈진 얼굴과 팔이 무척 쓰라렸다.
화상입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다시 올라와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데, 이런...
중문 해수욕장의 야영장은 그리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좋지 않다.
야영지도 땅이 고르지 않고 바로 도로변에 있다.
어떻게 된게 밤에 야영지에 바람한점 불지 않는가.... 제주도 바람 많다면서...
날이 그렇다 치고...
야영지 주변에 편의점 하나 없다.
사려면 저 위쪽 호텔단지로 가던지 아니면 저 아래 해수욕장 앞 가게로 가야 한다.
주변도로에서 중문해수욕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해발(고도)의 차이는 대략 100m가 넘는다.
100m가 무엇인가, 한 500m 정도?
야영지에서도 해수욕장까지는 가깝지만 절벽 옆으로 가파른 길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다행히 화장실과 수도는 가까웠다.
두 친구들이 오늘 쌀밥을 못먹었다길래 내가 가져온 전투식량을 다 꺼냈다.
그걸로 같이 친구들과 밥을 먹고 돈을 서로 모아 맥주와 회를 사다가 먹었다.
찬구라는 ROTC 친구는 4학년이다.
3학년때까지는 정신차리고 지내다가 4학년이 되면서 스스로 나태해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이번에 자전거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13시간동안 배를 타고 제주에 와서 나와 같은 방향으로 자전거를 타고 왔다.
다른 친구는 정호라고, 군대 면제된 친구다.
같은 청주에 있는 학교에 다니지만 집은 서울이다.
방학때라서 찬구와 같이 이번 여행길에 올랐다.
찬구보다 말이 없는 듯 했다.
게다가 정호의 고모부부가 야영지 윗쪽 콘도에 놀러와서 한밤중에 거기 인사드리러 갔다가 맥주를 더 얻어왔다.
두 친구들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얘기를 듣고 놀랬다.
내 베낭을 보고도 놀랬으며, 시뻘겋게 익은 내 피부도 보고 놀랬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며 여기저기 이야기를 해주니 자신들은 오늘 그냥 무작정 오느라고 제대로 구경 못한게 아쉽다고 했다.
두 친구들의 일정은 나처럼 3일이 아닌 일주일이다.
일주일동안 자전거를 타고 다닐 예정이다.
게다가 내일 다른 친구가 합류하여 여행한다고 한다.
젊은 친구들이고, 재미있는 친구들이다.
두 친구 모두 나와는 8살 차이나는 젊은이들이다.
그래... 나는 20대를 그렇게 보내지 못했다.
이제서야... 서른이 되어서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다.
그들과 나는 나이는 틀려도 서로 같다.
술자리를 파하고 12시가 넘어서야 각자의 텐트에 들어갔다.
오늘 있던 일을 정리하고 카메라 배터리를 확인했다.
내일 하루만 쓰면 끝일 것 같다. 아슬아슬하다.
아껴써야겠다.
게다가 오늘 저녁때는 사진도 찍지 못했다.
알고보니 하얏트 호텔 뒷쪽에 영화 쉬리에서 나왔던 언덕이 있단다.
그거 못보고 온게 아쉽지만 나름대로 혼자 청승맞게 그거 보러 갈 필요가 있냐고 자위하면서 눈을 감았다.
2003년 8월 2일 토요일.... 제주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