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 樂, 狂...


11:00
티켓팅을 끝내고 스타벅스에서 카푸치노 한잔을 마신다.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서울하늘의 풍경은 일단 흐림이다.
다행히도 일기예보에서는 저 아래쪽 제주는 맑다고 한다.

테라스 옆으로 비행기 이착륙 소리가 들렸다 사라졌다 한다.

날씨는, 다시한번 말하지만 흐리다.
흐리다기 보다는 뿌연 안개가 가득하다.
알록달록한 흐림이 아니라 하늘은 온통 회색이다.
구름한점 없는 하늘도 머리 위 색깔은 새파란 반면 저 멀리 지평선의 색깔은 약간 뿌연 하늘색인데..
지금 김포공항... 서울의 날씨는 온통 회색이다.
이곳 테라스에서 바라본 주변 건물 색깔도 회색이다.
그저, 여행객들의 알록달록한 무늬들만 천연색 칼라다.
「 눈 앞에 만져지는 다양한 생명들
각각의 고유의 색으로 자랑하지만
점점 사라져
내 눈에 점으로 비치면
그것은 주변과 똑같은 회색
하늘이 정해준 오늘의 색깔 」
잠시 후 난 다시 화려한 칼라 속으로 들어간다.
12:00
비행기 타는 것은 태어나서 두번째다.
일년 전, 울산에서 올라왔을 때.
엄청난 바람과 기상악화 속에서 비행기가 뜰까 말까 하다가 겨우 떴는데
그렇게 많이 흔들릴 줄 몰랐다.
다행히 같이 서울올라가는 친구가 계속 말을 걸어주어서 1시간이 금방 지나갈 수 있었다.
어떻게 오늘보다 더 시커먼 회색 하늘 속을 날아왔는지 몰랐다.
오늘은 그때랑 정 반대다.
난기류도 별로 만나지 않았고
날씨는 서울 하늘을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더할나위없이 새파랗게 맑아진다.
게다가 저 아래로 보이는 산과 들이란...
그리고 비행기보다 저 아래 있는 하얀 구름들이란....
나의 좌석이 창쪽이 아님을 통탄스러워했다.
계속 그렇게 바라보다가 어느새 바다 위로 올라왔다.
바다 위를 날고 있는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저쪽 자리의 어린아이만큼 나도 어려진다.
아니, 촌스러운가?
아무래도 좋다.
육지로부터 그렇게 점점 멀어지고 있고, 바다 위로 점점 다가서고 있다.
바다위로 비치는 태양이 간간히 반짝인다.
저 아래로 끊임없이 떨어지면 어떨까... 죽겠지...
하지만 저 하늘과 구름과 바다를 보니 왜 그리 사람들이 하늘을 나는 것을 열망해왔는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겠다.
어느덧 금새 제주도가 보인다.
처음... 태어나서 내눈으로 처음 보는 제주도...
제주도를 덮고 있는 구름은 없다.
다만 한라산 중턱/정상에 조금 걸려있을 뿐이다.
그래! 제주도야! 내가간다! 기다려라~ 한라산아!!!!
13:00
자전거세상 사장님이 봉고로 마중을 나오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보다 차로 5~6분밖에 걸리지 않은 가까운 거리의 가게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예전에 세운 일정과 새로운 일정, 그리고 찾아가볼 만한 명소들을 체크했다.
나의 목적은 원래 4박5일간 제주도를 일주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한라산에 욕심이 생겨서 2박3일동안 제주도 반을 자전거로 여행하고
하루를 한라산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이 일정에 맞춰 사장님이 알려주신 코스는 서쪽 방면 용두암-곽지해수욕장-협재해수욕장-수월봉-송악산-화순해수욕장-중문해수욕장-서부관광도로-제주시 코스였다.
원래대로라면 나의 욕심은
자전거타고 한라산 중턱까지 올라가서 자전거 세워놓고 한라산 등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지인의 말을 들어야지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몇군데 코스를 머리속에 염두해두고 출발하기 전 사장님께서 사진을 찍어주셨다.
아... 뒷 배경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으나... 베낭을 맸는데... 20kg 정도 되지 싶다.
일단 좋은 날씨와 좋은 기분을 가지고 사장님께 인사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출발한다구~~~~
13:30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용두암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용두암이 별 감흥을 일으켜주지 않는다.
뭐, 남들이 용두암 앞이 부러졌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데...
그것보다는 용두암쪽 가는 길에 있는 조그만 제단이 더 맘에 든다.
무릎정도의 높이로 제주도 돌로 바람막이를 하고 그 안에 자그마한 나무 두그루가 심겨져 있다.
산골짜기에 가면 돌담 아래, 혹은 나무 아래에 조그만 제단을 만들어 놓고 아낙들이 소원들을 빌던 것이 생각난다.
이것도 혹시 같은 의미가 아닐까?
돌벽 뒤에 숨어 있어도 강한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은 참으로 위태로와보인다.
저러다가 파도나 해일이 덮치면 어떻게 되나...
저렇게 만들어 놓은 사람이 궁금해진다.
이근처, 누가 무엇을 빌기 위해 심어놓고 세워놓은 것일까....
나도 나무 앞에 잠시 고개를 숙이고 사진을 찍어간다...
「 숨쉴 틈없이
바람에 몸을 맡겨
바다거품으로 입술을 적시고
뜨거운 태양아래 팔을 벌린다
네가 받는 고난으로
누구를 구원하길래
낯선 곳에 태어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가
돌벽을 쌓고
마른 짚을 덮고
그러면 소원이 이뤄지려나
그러면 고통이 덜해지려나
그래도 꿋꿋이
선명한 초록빛을 발하여
이곳에 새로운 집이라 외치는구나
네 이름은 무어냐
친구까지 있으니
이젠 외롭지 않으냐
행인들 찾아오니
이젠 아프지 않으냐... 」
14:25
약 1시간을 달리다보니 도두항이란 곳이 나온다.
그곳의 등대가 살짝 멋있어보여 등대 곁으로 갔다.
바람도 점점 더워지고 햇살도 점점 뜨거워진다.
그래도 항구 부두의 등대 밑에서 나도 등대처럼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도 누군가를,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들을...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그렇게 끊임없이 기다릴 수 있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등불이 될 수 있을까...
빨간 등대 아래 여러 사람들의 흔적이 보인다.
「ㅇㅇ야 사랑해!」
나는 누구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은 걸까...
14:40
길이 이상해졌다.
해안도로를 쭈욱 따라가다보니 이호해수욕장이 나왔는데,
길은 주차장으로 들어가더니 사라졌다.
에라 모르겠다.
자전거를 끌고 해수욕장 모래사장으로 뛰어들었다.
한 백미터정도 가면 길이 나올 것 같다.
모래 위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없다.
자전거는 단단한 땅 위를 달려야 한다.
발 끝에서 전달되는 힘이 페달을 돌리고
페달은 바퀴 축을 돌리면서
바퀴와 지표의 마찰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모래위에서는 그 마찰력을 깊은 모래가 흡수한다.
20kg의 군장의 무게는 내 발을 모래 속으로 빠지게 하고
자전거는 자전거 나름대로 모래 속으로 자꾸 빨려 들어간다.
5분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자전거를 끌고 갔으나
오히려 30분동안 자전거를 타고 비스듬한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만큼 힘들었다.
출발 한 후 지금까지 흘렸던 땀의 두배가 넘는다.
해변의 많은 사람들이 내 모습을 힐끗거린다.
벌써부터 이렇게 힘을 빼니 앞으로의 고생이 예상된다.
해수욕장 입구쪽으로 도로를 발견하고 신나게 다시 자전거에 올라탄다.
15:10
내도라는 마을이 나온다.
해안도로를 벗어나 마을 안 도로로 달리다보니 여기저기 공사중이다.
(제주도는 공사중... )
서쪽으로는 이곳 저곳 공사하는 곳이 많았다.
하수도공사라는데...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관광하러 온 사람들에게도 편할 것이다.
그렇게 단지 예전의 모습들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조금 더 가다보니 이번엔 외도라는 마을이 나온다.
그제서야 아까 내도라는 마을이 생각보다 많이 오래된 마을이었다는 걸 생각했다.
거기에 비하면 이 외도쪽은 아파트 단지도 있다.
도로를 중심으로 안쪽으로는 아파트단지, 해안쪽으로는 제주도 돌담길이 보인다..
내도와 외도의 차이가 어느정도는 느껴지지만...
어째서 이름이 내도이고 외도일까...
파랗고 빨간 스레트 지붕 사이로 제주도 특유의 집 지붕이 보인다.
도로를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서는 순간
도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
특히나 인상 깊은 것은 돌담이다.
골목골목을 따라 꼬불꼬불하게 늘어서 있는 돌담들...
새까만 돌담들은 그 높이도 모두들 제각기이다.
돌담골목을 따라다니다가 문득 해안으로 나왔다.
이곳은 마을 사람들의 공동 어장이다.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서 공동으로 어패류를 채취하는 것 같다.
잠시 구경하고 나오는데
마을의 이방인을 경계하고 마을을 지키려는 듯, 한 집안의 강아지가 짖어댄다.
15:40
외도를 지나 어느덧 다시 경치좋은 해안도로로 나왔다.
적당한 높낮이로 삐질삐질 땀을 흘려 올라가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내려온다.
우리 인생의 길이 모두 평평하고 같은 높이의 길이 아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다.
자전거의 길도 그러하다.
그러나 자전거 길의 오르막은 단지 내리막길을 위한 시험대이다.
은근한 끈기와 체력을 가지고 오르막을 오르지 않으면 내리막에서의 짜릿함은 느낄 수 없다.
괜찮다.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도 되고,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도 된다.
자전거여행을 하는 순간은 자전거는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몇차례의 오르막 내리막길을 들리다가 다시 나타난 낮은 오르막길을 만났다.
그러다가 갑자기 해변쪽에 이상한 바위들이 보여 자전거를 돌려 내려갔다.
처음 보는 신기한 바위들이다.
용암이 녹아 흘러내리다가 바로 그렇게 평평하게 되었나?
몇백미터 앞까지 편편한 검은 바위들이 해안에 즐비해있다.
분명 이 바위들에 사람의 손길이 거쳐간 흔적이 느껴진다.
알고보니 몇백년동안 이뤄지던 소금캐는 곳이다.
천일돌염전.
돌에서 소금을 얻는다.
이지방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던 흔적이었다.
비록 수십년 전에 끊기긴 했어도...
이렇게 섬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삶을 터득한다.
나는 지금 이 섬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16:40
애월이란 곳을 지나자 곽지해수욕장이 나왔다.
자전거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사장님이 칭찬했던 곳이다.
가다가 더우면 이곳에서 샤워하면 몇시간동안은 시원할 것이라고 했다.
바로 지하수가 솟아오르는 용천수가 있는 곳이다.
제주도의 태반은 다 돌이다.
용암으로 된 섬이다.
그래서인지 비가 오면 바로바로 지하로 빠진다고 한다.
지하에서 바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데...
그렇게 바다로 흘러들어가다가 바위로 막힌 곳에서 다시 지상으로 샘솟는다고 한다.
그곳이 용천수라고 한다.
펌프가 없는 자연 지하수인 것이다.
이곳 곽지해수욕장의 용천수는 해변으로부터 10~15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바로 바다에서 나와 샤워하면 되는 곳이다.
남탕, 여탕으로 구분 되어있는 이곳에서 용천수는 마치 폭포처럼 쏟아진다.
아니, 도시의 도로 한가운데서 수도관이 터졌을 때 나오는 물처럼 솟아내린다.
어느새 땀과 피로로 뒤범벅되어있던 나에게도 해변에서 솟아나는 차가운 물폭포가 필요했다.
십여분간 떨어지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뜨거워진 육체가 조금 식었다.
그제서야 뜨거운 태양빛을 다 받은 피부가 걱정된다.
아무리 내가 시골형 피부라고 해도 서울/인천에서 산지 꽤 되지 않았는가.
겁이 나서 로션을 좀 바르고 다시 출발한다.
18:00
곽지를 떠나 시골 논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한림까지 왔다.
이 근처가 1일차 목적지인 '협재 해수욕장'이 있을텐데 보이지 않아 중간에 또 부두로 샛다.
「한림항」
부두로 들어가는 입구에 어제인지 오늘인지 잡은 오징어들이 주욱 줄에 걸려있다.
동해가 아닌 남해, 제주도에서 본 오징어다.
인상적이어서 한 장 찰칵.
저녁이다보니 배들이 계속해서 부두로 들어온다.
저 바다에서 무엇을 잡고 무엇을 기대하고 들어오는 것일까.
부두에 앉아 물끄러미 바다를 쳐다본다.
부두 바로 앞에서 수십미터를 이동하면서 계속 자맥질하는 해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서야 기세를 잃어가는 태양빛이 마지막 안간힘을 바다 위에서 쓴다.
그 빛줄기를 가르며 해녀는 꾸준히 자맥질한다.
부두 안쪽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다.
묘한 상황 속에서 왠지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18:20
드디어 협재 해수욕장에 도탁했다.
날이 금방 어두워질 것 같아 야영지에다 여장을 풀었다.
야영지 주변에 자전거들이 많이 보인다.
그들도 자전거여행을 하고 있겠지... 여럿이서...
1~2인용 텐트를 치고, 짐정리를 하고 가져온 전투식량을 하나 먹고 캔맥주를 두 개 마시니
어느새 8시 반이다.
바다를 볼까 하다가 벌써 어둑해진 밤바다를 보기는 좀 그렇다.
그리고 무지 피곤하고 졸립다.
괜히 자전거여행을 시작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사타구니가 따끔따끔해지고, 얼굴과 팔에서는 계속 열이 난다.
어떻게든 오늘 잘 자야겠다.
내일의 일정은 오늘 간 거리의 한배 반이 넘는다.
아직은 유명 관광지보다는 차라리 동네 어촌 구석 돌담이 더 맘에 든다.
21:30
맥주를 마시며 오늘 있었던 일을 정리해봤다.
야영지 주변이 시끄럽다.
다들 술마시고 같이 온 사람들끼리 잘 논다... 진짜다... ^^a
나는 좁은 텐트 안에서 혼자다.
여행은 쓸쓸한 것이고 외로운 것이라는데...
지금 이 자리에 누워있는 나는
비록 잠자리는 그리 좋진 않아도...
아직은 쓸쓸하거나 외롭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너무 피곤해서일까?
그러나 아직 여행의 반도 오지 못한, 이제 겨우 시작했다.
이정도가지고 피곤해 죽겠다면 차라리 여해을 떠나지 말았어야지...
이상하게도 두려움과 기대가 동시에 몰려온다.
힘들어도 재미있다.
너무 힘들면 재미 없겠지...
오늘은 많이 힘들진 않아서 여기저기 둘러보며 경치, 풍경을 구경하느라 제대로 생각을 못했다.
왜 내가 여행을 혼자 하는지... 제주도까지 와서 하는지...
옆 텐트에서 좀 시끄럽다....
어서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