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 樂, 狂...

감은사지(感恩寺址)는 감은사라는 절의 터를 말하는 것 같다.
감은사는 동해안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지금은 3층석탑 2기와 금당 및 강당 등 건물터만 남아있다.

신라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웠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왕이 죽자, 그 뜻을 이어받아 아들인 신문왕이 682년에 완성하였다.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절 부근의 대왕암이며,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강당·금당·중문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금당 앞에는 동·서쪽에 두 탑을 대칭적으로 세웠음을 밝혔다. 이 건물들은 모두
회랑으로 둘러져 있는데, 이러한 배치는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금당의 지하에는 배수시설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죽은 문무왕이 바다용이 되어 이 시설을 통해 왕래하였다고 전해진다. 금당 앞의 탑 2기는 우리나라의 석탑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석탑의 모범이 되고 있다.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나라를 보호하는 호국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언제 절이 무너졌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빗줄기가 줄어드는 가운데 지방도로에서 멀리 감은사지가 보인다.
처음엔 그냥 절의 담 같은 것에 가려서 큰 탑이 두개 보이는 듯 했었다.


그러나 저것이 담이 아님을 올라가서야 알게 되었다.
문화재임을 알리는 표지판 옆으로 있는 계단.
그 계단을 올라 커다란 두개의 탑을 보는 순간 약간은 압도되었다.
오전에 불국사에서 본 다보탑과 석가탑에 비해 그 위압감에 움찔했었다.


<감은사터>에 있는 3층 쌍탑은 석탑으로서의 위용과 질감을 그대로 보여주는 웅장한 탑이다. 바로 가까이 서면 탑의 웅장함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전탑과 목탑양식에서 벗어나 돌이 가진 성질을 그대로 나타내면서, 5층 석탑이 가지는 안정감과 상승감을 동시에 살린 걸작이라고 한다. (중국은 전탑, 일본은 목탑, 우리 나라는 석탑의 나라라고 한다.)

신문왕 2년(682년)에 만들어진 동탑과 서탑은 같은 규모와 구조를 가진 것으로 쌍탑의 출발이 된다. 높이가 13.4m로 아주 높고, 기단을 이중으로 한 형식을 취해 그 이후 한국석탑의 규범이 되었다.

또, 1960년대 석탑을 해체 보수할 때 3층 탑신에서 창건당시 설치된 매우 정교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국립 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탑 꼭대기에 있는 철심은 상륜부 장식을 끼워넣은 것으로 장식은 유실되어 없어지고 심만 남은 것이라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철심으로 오랜 세월 탑과 함께 해온 것이다.


여기가 금당터다. 강당의 역할을 하는 터이지 싶다.
물론 맨처음 보았을 땐...... 예비군 훈련 교장인줄 알았다... ㅡㅡ;;;
이 밑의 공간이 문무대왕릉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이 밑을 확인할 수는 없다.


왼쪽 아래 용담이 있는 곳.
못이라 하지만.... 얼핏 보기에는.... 터파기 공사 하다가 중지한 듯 보인다.
가운데의 길이 도로다. 오른쪽이 서쪽으로 쭈욱 가다보면 경주가는 길이 나오고
왼쪽으로 쭈욱 가다보면 2km 지점에 바다가 나온다. 감포가는 길이다.
왼쪽 아래의 큰길이.... 감은사지로 들어오는 길이다.


누군가 얘기하는 것을 얼핏 들었는데 원래 이 석탑은 3층이 아니라 5층이었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일까?
그렇지 않아도 삼층 윗쪽으로 뾰족히 솟아있는 쇠막대기 같은 것이...
윗쪽으로 두 층이 더 올라갈 정도의 높이라는 것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던 아니던.... 확실히 석탑의 위용은 놀랠만 하다.

감은사 탑의 역사적 의의
감은사 탑이 만들어진 시기는 아주 분명하다. 삼국유사에 682년에 공사를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682년이면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당나라가 신라까지 속국으로 하려던 야욕을 물리치고 홀로서기에 성공한 시기이다. 아울러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이루어가던 최대 전성기로 발돋음하던 그 시기이다. 이제 통일왕조에 걸맞는 그런 거대하고 독창적인 탑이 필요했을 것이다. 감은사지 석탑에 이르러 우리는 신라 석탑의 정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양하게 발전되어 오던 한국 석탑은 감은사지를 출발로 하여 고선사지 3층탑, 불국사 석가탑 등을 거치면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이후 한국 석탑은 감은사지 3층탑의 형태를 모든 석탑 제작의 기본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1959년 해체 수리 중에 서탑 3층 몸돌에서 청동사리함이 발견되었고 그 뒤 1990년대 후반 동탑에서 또 한번 사리함이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 뒤 해체 복원 공사를 잘못해서 서탑이 붕괴될 위험이 있어 다시 조정 공사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 2001년 5월의 감은사는 사진에서 본 것과 같이 보수 공사를 위한 철제 빔에 둘러 쌓여 있었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고려 음서제도를 조사해 오라고 과제를 냈는데 어떤 여학생이 발표를 하면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음자에 주목하시라! 음이란 양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죽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조상이다. 조상 덕에 먹고 산다는 뜻과 일맥 상통한다." 바로 오늘의 우리를 말하는 것 같다. 21세기 최첨단 시대니 어쩌니 하고 떠들고 있지만 1300년전 조상님이 세웠던 탑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우리다. 어느 절을 가도 새로 만드는 탑이나 석등, 건물은 모두 옛것을 배껴 먹기에 급급하다. 그러면서도 왜 제대로 배끼진 못할까? 기왕 배끼는 것 제대로 배끼던지... 언제까지 음덕만으로 먹고 살아야 하나! 언제나 우리도 후손들에게 음덕을 배풀면서 살수 있을까?
출처 : 이승훈의 신한국 기행 http://talman.pe.kr/pagoda/pagoda-kamunsa.htm
감은사지를 나와 문무대왕릉으로 향했다. 5~10분정도 달리자 바다가 나온다.
차들이 옆을 지나가는데도 불구하고 파도소리가 엄청 시원하게 날려온다.
태풍이 바로 지나가고 있는 터라.... 비는 어느정도 그쳤지만
파도가 장난이 아니다.


멀리 문무대왕릉이 보인다. 저기가 대왕암이란 말인가?


조금 더 자세히 끌어당겨서 찍었다.
누구 말마따나 바다에서 보면 그냥 바위일 뿐이다.


그러나 파도와 함께 어울리는 저 바위가 왠지 굉장한 힘이 있게 느껴진다.
파도와 날씨때문에... 이상한 생각까지 한다.
◈문무대왕릉(대왕암)◈ 

토함산뒤쪽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대종천을 이루고 그 물줄기가 동해로 흘러드는 감포 앞 바다.
봉길리 해수욕장이 들어선 이곳 해안에 서면 바다 쪽으로 약200m 떨어진 곳에 바다 경치를 돋우는 아담한 바위섬이 눈에 들어온다.
문무왕의 산골처 혹은 수중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이다.
멀리서 보는 대왕암은 평범한 바위섬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위 한 가운데가 못처럼 패어 있고 둘레에 자연암석이 기둥 모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진 모습이다한 변의 길이가 약3.5m되는 못 안에는 거북이 등 모양의 길이 3m, 폭2.2m의 돌이 얹혀져 있다.
못 안의 물은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며, 거센 파도에 아랑곳없이 항상 맑고 잔잔히 흐르도록 되어 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트인 십자형의 수로를 통하여 동쪽으로 들어온 물이 서쪽으로 난 수로의 턱을 천천히 넘어 다시 바다로 흘러나간다. .
못 안의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 장치가 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다만 외곽을 둘러싼 바위 안쪽에 인위적으로 바위를 따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그렇게 추정할 따름이다. 사실 대왕암은 오래 전부터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납골을 뿌린 산골처로 알려져 왔으며, 주변 어부들은 이미 이곳을 신성하게 여겨 근처에도 잘 가지 않았다.

문무왕은 아버지대의 백제 정벌(660년)에 이어 고구려 정벌(668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후신라에 대한 당의 야심을 알아채고 그 세력을 몰아내는 전쟁까지 치러냈다.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대업을 마무리하여 명실공히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시대를 연 문무왕은 평소 이렇게 유언하였다.

"이때까지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제 삼국이 하나로 통합돼 한 나라가 되었으니 민생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그러나 동해로 침입하여 재물을 노략질하는 왜구가 걱정이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 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인력을 수고롭게 할뿐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는 불로 태워 장사할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힘써 검소 와 절약을 좇아라."
(삼국사기 - 문무왕21년조)
또한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신문왕은 681년 7월 7일 즉위하였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 변에 감은사를 세웠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682년에 마쳤다.
금당 계단 아래를 파헤쳐 동쪽에 구멍을 내었으니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한 것이었다. 생각건대 유조로 장골(葬骨)케 한곳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으며, 그 후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

한편 조선 시대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의 문집 「이계집」에는 그가 문무왕릉 비의 파편을 습득하게 된 경위와 문무왕의 화장사실, 그리고 대왕암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1796년경 홍양호가 발견했다는 문무왕릉 비 두 편 가운데 한편과 그 보다 작은 파편 하나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나무를 쌓아 장사 지내다(葬以積薪), 뼈를 부숴 바다에 뿌리다(硏骨鯨津)"라는 대목이 있다.

결국대왕암이 세계 유일한 수중릉이라는 것은 후세 사람의 욕심에서 나온 근거 없는 희망사항 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무왕의 호국의지를 담은 대왕암의 본뜻이다. 대왕암은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무왕의 화장과 관련된 유적지로는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지고 있는 능지탑이 있다. 일제 시대에 발견된 '사천왕사지문무왕비편' 이라는 묵서(墨書)를 근거로 문무왕릉비가사천왕사에 세워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능지탑과 사천왕사터는 경주 배반동 낭산 기슭에 있다.

문무대왕릉

사적 제158호
소재지 :경상북도 정주군 앙복면 봉길리

일명 대왕암이라 불리는 이 동해 가운데의 바위섬은 나당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 무열왕의 뒤를 이어 21년간 재위하는 동안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676년에는 삼국의 영토에 야심을 드러낸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여 삼국 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신라문무대왕(661-681)의 수중릉이다.

죽어서 동해의 큰 용이 되어 왜적으로부터 동해를 지키겠으며, 인도식으로 화장하여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는 대왕의 유해를 화장하여 이곳 동해의 대석상에 매장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 능은 육지에서 약19.8m 떨어져 길이 약 200m의 바위섬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 동서남북으로 십자수로가 나 있다.

바위섬 가운데 는 조그만 수중못을 이루고 있으며 그 안에 길이 3.6m 폭 2.85m, 두께 O.9m 크기의 거북모양 화강암석이 놓여 있어 그 속이 화장한 유골을 봉안한 납골처로 생각되고 있다. 한편 대왕암이 화장한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라는 이설도 있지만 이 곳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숭고한 호국 정신이 깃들여 있는 곳이며, 이러한 수중왕릉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특이한 것이다.




파도와 함께 바람과 함께 해변으로 밀려오는 하얀 물방울들이 얼굴을 적신다.
꿈을 꾼다.
저 멀리 동해바다에서 저기 바위까지 헤엄쳐와 잠시 휴식을 취하다
바위 안으로 또아리를 틀고 비집고 들어가
바위 아래 있는 통로를 통하여 조용히 감은사로 향하고
감은사에 놓여져 있었을, 금당 위에 놓여져 있었을 문을 통해 나와
조용히 동해바다를 보며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길을 보며
조용히 미소짓는 나를 본다.